중국 3대 악녀 중 부동의 멤버,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후



여후(呂后)

? ~ 180년

한고조 유방의 아내이며 황후. 명문으로 알려진 여(呂)씨의 후손이다. 시호는 남편 유방의 시호였던 고황제에서 유래해서 고황후((高皇后). 중국 최초의 황후이며, 최초로 황후, 황태후, 태황태후라는 3단계를 거친 여인이다.

 

부유한 명문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아버지인 여공(呂公)이 패현에서 할 일없는 건달 노릇이나 하던 유방을 보고 그의 몸에 왕의 기운이 있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냈다고 전한다. 미인이지만 성격은 꺽달지고, 내면에 무서울 정도의 야심을 지닌 여성이었다. 심지어 포로가 되어 항우 앞에 포박당해 있을 때도 “네 놈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냐? 죽일테면 죽여봐라. 너 따위가 내 남편을 이길리 없다.”라는 태도를 유지해서, 같이 포로가 된 유방의 부모와 항우가 질리게 만들 정도로 담력이 강했다.

유방이 완전 피라미 시절에도 담담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며 집안을 확실히 내조했으며. 결국 아버지가 바란대로 귀인의 자리에 오른다. 물론 그 후 그녀가 중국 3대 악녀 중 하나가 되는 잔인무도한 악행이 시작되었다.

토사구팽이라는 일화로 알려진 것처럼 유방은 한신, 팽월, 경포 등 위협이 될만한 개국공신 출신 이성 제후왕을 모조리 숙청한 후, 모두 유씨 황족으로 갈아치우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도 내심 마음이 내키지는 않아서 노골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면 목숨만은 살려주려고 했다. 팽월, 한신도 그래서 직위를 빼앗기는 선에서 끝내려 했으나 여후가 나서서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또 다른 이성 제후왕이며 유방의 죽마고우였으나 모반을 했던 노관은 “유방이 병들고, 여후는 왕을 숙청하고 있다...”하며 여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반을 철회하지못했다. 노관은 유방의 병이 나으면 죄를 빌 생각이었으나 결국 유방이 죽자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이렇게 이성 제후왕을 숙청한 여후는 한술 더 떠서 유씨마저 제거하고 모두 여씨 일족으로 채우려 생각했었다.

유방이 태자 유영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총애하던 측실 척부인 소생인 유여의를 자신과 닮았다고 칭찬하며 태자로 삼으려했다. 척부인도 유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했다. 하지만 유방의 생각은 주창(周昌) 등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쳤으며, 여후는 신선술을 배운다는 명분으로 숙청의 피바람을 피한 장량과 손을 잡고 당대에 유명했던 은둔 명사인 ‘상산사호’를 모셔화 유방앞에 보여준다. 자신이 불러도 오지않던 명사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본 유방은 결국 태자를 폐위시키는 것을 포기한다. 대신 유여의를 조나라의 왕으로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부인과 함께 가도록 했으며, 질투가 심한 여후가 자신이 죽은 후 유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해서 태자 폐위에 반대해서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으로 임명했다.

유방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여후는 현 재상인 소하가 나이가 들었으니 후임 재상을 누구로 할지 물었다. 유방은 소하의 후임으로 조참을 지목한다. 여후가 조참 사후에는 누구를 재상으로 할지 물으니, 내정은 진평에게 맡기고, 군사는 주발에게 맡기라고 말한다. 여후가 다시 두 사람의 후임을 물으니 유방은 기가차서 대답했다.

“그 뒤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

 

중국 드라마 초한전기의 여후

그러나 유여의 모자는 여후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유방이 죽고 아들인 혜제가 즉위하자. 여후는 우선 척부인을 영항(永巷)에 감금하고, 하루종일 쌀을 찧는 형벌을 내렸다. 그 다음 조왕을 장안으로 소환해서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나라의 재상이 된 주창은 여치의 의도를 파악하고 3번에 걸친 소환 명령을 조왕의 병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이에 여후는 주창을 먼저 소환한 후 조왕을 소환했다. 여의는 계모의 명을 어길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장안으로 출발해서 궁궐에 들어왔다.

 

모친과 달리 인자한 성격이었던 혜제는 이런 어머니의 속셈을 간파하고, 미리 이복 동생을 마중나가 자신이 기거하던 건물로 데려와 침식을 같이 하며 옆에서 보호했다. 혜제가 온힘을 기울여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여의는 혜제가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에 독살당했다. 유여의의 사망으로 기반을 잃은 척부인 또한 산채로 손발이 잘리고, 눈이 뽑히고, 벙어리로 만든 후 귀에 유황을 넣어 귀머거리로 만들어 돼지우리에 던져넣고 똥을 먹여 죽였다.

게다가 그 모습을 아들인 혜제에게 보여주었다. 그 후 혜제는 “사람이 되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어머니인 여휴에게 말한 후 정치에서 손을 놓고, 폐인처럼 지내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아들 혜제가 죽은 후 혜제의 양자인 소제 유공이 즉위하지만, 어린 나이로 인해 여후가 섭정을 하며 국가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남편 유방의 유언을 어기고 연나라 왕의 자리를 자신의 친족인 여통에게 물려주고, 군대의 수장들도 여록과 여산 같은 자신의 친족에게 맡겼다. 이 탓에 소제 유공이 성장하면 복수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유공을 폐위시키고 유홍을 즉위시켰다.

주로 사용한 것은 짐주(鴆酒)라는 이름의 독. 독사를 먹고 사는 새인 짐새의 깃털로 만든 술이라고 한다. 유여의도 이것으로 죽였고, 서장자인 제왕 유비와 혜제가 건배를 할 때 짐주로 바꿔치기해서 먹이려다가 혜제가 일부러 짐주가 든 잔을 들고 마시려하자 여후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잔을 빼앗아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때 목숨을 건진 유비는 여후의 딸인 노원공주에게 봉지의 대부분을 바쳐서 여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그나마 제도혜왕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조은왕은 짐주를 먹고 죽었고, 유방의 또다른 서자였던 조유왕 유우는 조나라에서 말을 한 번 잘못했다가 여후에게 잡혀가서 비참하게 굶어죽었다. 여후는 조유왕을 죽이고 유방의 또다른 서자 조공왕 유회를 양나라에서 조나라로 옮겼으며 여씨의 사위로 삼았다. 그러나 조공왕가 딴 여자를 사랑하자, 여후는 그 여자를 죽였다. 조공왕은 슬퍼하며 자살했고 여후는 조공왕이 여자 때문에 목숨을 버린 어리석은 자라고 비웃으며 조나라를 자신의 조카 여록에게 주었다. 유방의 또 다른 서자 연영왕 유건이 있었는데 그가 서자를 남겨놓고 죽자 여태후는 서자를 죽이고 자신의 조카인 여통에게 연나라를 주었다.

유방의 여섯 아들, 제도혜왕, 혜제, 조은왕, 조유왕, 조공왕, 연영왕이 모두 여후 때문에 인생이 망가져 버린 것이다. 그나마 문제와 희남여왕 유장만이 화를 피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어머니 박 씨가 유방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질투를 면했고, 조유왕과 조공왕이 비명횡사한 후 여후가 제안한 조나라 왕위를 겸손하게 거절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희남여왕은 어머니 조씨가 여후의 질투심으로 인해 자결하는 바람에 여후가 직접 키웠던 탓에 정이 있었던 듯 하다.

 

실로 무섭고 추진력있는 여장부였던 여후는 말년에 갑자기 투명한 푸른 개에 물리는 환각을 체험한 후 병을 앓다가 죽었다. 죽으며 자신이 없어지면 다른 유씨와 그 추종세력의 공격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뒤를 이을 만한 인물들이 모두 무능력하기 그지없었다. 결국 숙청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때를 기다리던 왕릉, 주발, 진평 등 유방이 천하통일할 때 큰 공을 세웠던 개국공신들과 다른 유씨들이 봉기해서 일족이 몰상당했다. 이때 유방의 오른팔로 유명한 개국공신 번쾌의 아내이자 여후의 동생이었던 여수도 살해당한다.

 

개국공신들이 봉기를 일으킬 때 그를 따르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알기 위해 “여씨를 계속 따를 자는 오른쪽 어깨 갑옷을 벗고, 유씨를 따르는 자는 왼쪽 어깨 갑옷을 벗어라.”하고 명령하자 군사들이 빠짐없이 모두 왼쪽 어깨 갑옷을 벗었다고 하니 여후의 악명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후일 한나라가 멸망한 후 혼란기에 적미군이 장안에 들어가 역대 한나라 황릉을 대거 도굴할 때 유방과 여후가 묻힌 장릉도 도굴당했는데 이 때 시체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일본 코믹스 레드 드레곤에서 어린 소녀로 나오는 여후

세상의 평가는 서태후, 가남풍과 함께(가끔은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 3대 악녀의 한 명으로 불린다. 하지만 실상은 세상의 평가와 많이 다르다. 사마천은 여후의 치세에 천하가 평안했다고 평했을 정도다. 그 이유는 첫째로 전쟁에 시달리던 전국시대~초한대전의 난세보다 황실이 집안 싸움을 하는 것이 나았고, 둘째로 한나라 초기는 진나라의 강압적인 통치에 대한 반동으로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정치, 즉 ‘무위지치’를 추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는 직무를 방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백성들을 피로하게 만드는 정책을 세우지 않는 황로(黃老) 사상에 기반을 둔 정책이었다. 게다가 사마천은 여후의 행적을 제왕의 행적을 다루는 본기에 넣는 파격적인 모습까지 보여줬다. 그는 여후 시절에는 형벌을 가하는 일이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어서 치안이 좋았고 백성들이 농사일에만 힘쓰니 입고 먹는 것이 갈수록 넉넉해지는 태평성대였다고 그녀의 공로를 칭송했다. 게다가 권력층 내부에서는 피터지는 권력싸움의 연속이었으나 여후가 치세를 잘한 덕분에 한나라를 반석에 올린 것은 그녀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후한이 세워지고 한나라의 정통을 이어받은 광무제가 그녀의 칭호를 받탈한 이후 여후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중국 역사를 대표하는 악녀로 통해왔으나, 최근에는 여후의 치세에 황실은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치열한 시대였을지 몰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특별한 전쟁도 없고, 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든 매우 평화로운 시대였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챗봇혁명
국내도서
저자 : 킨조 신이치로 / 김영택역
출판 : e비즈북스 201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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