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의 딸 관삼소저(關三小姐) 관은병(關銀屏)



관우의 딸 이름은 정사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관우에게 딸이 있던 것은 확실하다.

 

관우에게 딸이 있었던 건 사실로 《정사 삼국지》에서 손권이 관우에게 서로의 자식을 결혼시켜 혼인 동맹을 맺자는 언급이 있어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일화에서 손권이 자기 아들과 그대(관우)의 딸을 혼인시키자며 사자를 보내오자 관우의 대답은 이러했다.

 

"호랑이의 새끼를 개의 새끼에게 줄 수 있겠느냐?"

 

결국, 이 때문에 촉과 오는 형주를 두고 형주 공방전 및 이릉대전까지 치르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 관우 딸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안 나온다.

장비의 딸 두 명은 모두 유비 아들 유선과 결혼해서 황후가 됐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정사에 뒷이야기가 없다.

오나라 손가에서 탐냈던 처자였고, 관우의 이름을 생각하면 좋은 곳에 시집가서 잘 살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신으로까지 추앙받는 관우의 딸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그래도 뭔가 아쉽다.

이런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는지 관우 딸에 대해 아쉬움은 민간에서는 전승 설화로 달래려 했던 것 같다.

 

관은병은 이런 민간전승으로 전해지는 이름이다.

 

운남성 곡성현의 민간전승에 따르면 관은병(관삼소저)은 204년~271년까지 살았으며 자는 불명이다. 관우의 세 번째 딸이라고 한다.

유비와 함께 형주의 유표 밑에 의지하고 있던 205년 무렵 관우는 옥구슬 같은 귀여운 딸을 낳았다. 

장비는 이 조카를 매우 귀여워해서 관은병이라고 이름 붙였다. 관우는 호로관에서 여포와 싸워 승리했을 때 여포의 자금관에 달려있던 진주를 소중히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관은병에게 선물했다. 재앙을 쫓은 힘이 있었다고 믿어졌으나 유선, 장포, 관흥 등 보주나 주술에 흥미가 없는 남자에게는 주기 아까운 물건이었다고 한다(진주는 관우가 아니라 장비가 선물했다고도 하며, 관우, 장비에게 모두 받았다고도 한다).


건안 24년 15세 정도로 성장한 관은병은 한층 아름다워져서 백옥같고 현명한 아가씨로 자랐으며 기예에 능통했기에 혼인 신청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손권도 관은병의 평판을 들었다 손권은 관우에게 관은병과 자기 아들이 혼인할 것을 요청했으나 관우는 "호랑이의 새끼를 개의 새끼에게 줄 수 있겠느냐?"라며 거절했고 이 때문에 관우는 손권의 원한을 샀다.

 

건안 24년 12월 손권이 관우를 공격했다. 

관우의 형주는 함락되기 직전이었다. 관우는 유비와 제갈량에게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핑계로 관은병을 형주에서 익주로 보냈다. 관우, 관평, 주창 등은 손권군의 마충, 여몽 등에게 사로잡혀 자결 또는 목이 베어졌고 이후 “형주성이 함락됐으나 여포의 진주 덕분에 관은병은 목숨을 구했다.”라는 소문이 났다.


하지만 관은병은 아버지 관우와 오빠 관평의 원한을 풀고 싶어 성도에서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 말라가고 있었다. 장비가 옷을 선물해도 관은병은 눈물만을 흘리며 “아름다운 장식 등 지금 저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유비는 어린 조카딸이 매일 매일 여위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매우 가슴이 아팠다.

한번은 제갈량이 그녀를 불러놓고 꾸중을 했다.

“은병아! 너도 이만큼 자랐으니 너의 부친과 형제들처럼 나라의 일을 중히 여기고 백부를 위하여 근심을 함께 나누어야지, 이렇게 늘 슬퍼하고만 있어서야 되겠느냐”

이에 은병은 비로소 슬픈 감정을 참아내고 정신을 차려 밥을 먹기 시작했다. 관은병은 조운에게 무예를 사사하여 무예를 익히기 시작했다.


건흥 3년 운남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갈량은 반란이 자주 발생하는 남중에 스스로 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가려 했다. 관은병은 이 토벌에 따르게 됐다. 관은병의 본심은 운남보다 먼저 형주의 손권군을 치고 싶었으나 “부모의 원수는 현관으로 도둑이 들어온 것과 같고 지금 운남의 반란은 뒷정원에 불이 난 것과 같습니다. 뒷정원의 불을 끄면 현관에서 들어온 도둑을 사로잡는 것에 집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 승상은 이것을 깨닫고 계십니다.”라며 나라의 방침을 이해했다.


제갈량은 남중 유원 출신 이회를 부관으로 삼고 그 아들 이울도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스스로 중매인이 되어 관은병과 혼인시킨 후 종군시키려 했다. 사람들은 규중아가씨가 변경에 원정하는 것을 우려해서 관은병을 말렸으나 관우의 뒤를 이은 관흥이 혼담을 승낙했다. 관은병은 이회 부자와 남정에서 공을 세우고 세 명은 그 후에도 유원에 정착해서 지방 토착민에게 양잠, 농경부터 읽기와 쓰기와 주판, 나중에는 조운에게 사사한 무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가르침을 전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해서 “관삼소저”라고 친근하게 불렀다고 한다.

관은병은 남정 이후 유원을 떠나는 일은 없었으나 금련산에 매일 아침 올라 북방을 바라보고 화장을 하며 아버지와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죽은 후 마을에 남편 이울과 함께 매장되어 나중에 합사됐다. 매년 청명 무렵 현지 주민이 모두 참배를 하며 그녀에 대한 존경의 뜻을 전했다고 한다. 또는 금련산에 관우가 남긴 진주와 함께 묻혀서 지금까지도 맑은 날에는 산 정상이 오색으로 번쩍인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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